올해도 우리 집 매실나무는 꽃이 더딥니다.
아랫집은 벌써부터 뽀얗게 하얀 꽃을 피우고 벌을 꾀는데, 연분홍 꽃을 피워 올리는 우리 집 매실나무는 굼뜨고 게으른 주인을 닮아서인지 이제야 꽃망울을 부풀리고 있습니다.
생으로 먹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한 맛을 가진 열매이지만, 숙성을 하거나 요리를 통해 열매와는 다른 묘한 풍미를 느낄 수 있는 덕분에 '동양의 올리브'로 불리는 매실은 중국이 원산지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광양을 중심으로 주변의 하동과 순천 등이 매실로 유명세를 타고 있으며, 김포에서도 잘 적응하는 유실수 중 하나지요.
망매해갈(望梅解渴)이라는 말은 조조의 군사들이 긴 행군으로 지쳐 갈증을 호소하자 조조가 "저 언덕 너머에 매실밭이 있다"라고 거짓말을 하여, 신 매실을 떠올린 병사들의 입에 침이 고이게 함으로써 갈증을 해소시켰다는 고사에서 나왔습니다.
열매로서의 매실은 숙성을 시켜 청이나 효소 등으로 먹게 되는데, 이는 음식의 감칠맛을 돋우는 양념이 되기도 하고, 과육은 장아찌로 만들어 반찬 그 자체가 되기도 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매실로 만든 '우메보시'를 약처럼 먹는다고 하지요.
이에 비해 꽃은 어쩌면 더 귀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매화는 선비들의 고급 취미라 할 수 있는 수묵화의 사군자 중에서 버젓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난 인내와 절개의 대명사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특히 설중매(雪中梅)는 매화 중의 으뜸으로 여겨집니다.
수령 370년이 넘는 양산 통도사의 홍매화 자장매, 봄을 가장 먼저 알린다는 거제 남파랑길 주변 구조라 초등학교의 춘당매, 순천 조계산 기슭 선암사에서 60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선암매, 장성 백양사 뜰에서 한 그루만으로도 경내 전체에 꽃향을 채운다는 고불매 등 전국 도처에 이름난 매화나무와 군락지가 있어 봄마다 사람의 발길을 이끕니다.
눈을 비집고 머리를 내미는 노란 복수초, 야트막한 울타리가 되어 뒤란 장독대 항아리들과 키를 맞추며 노랗게 피는 개나리, 앞산 뒷산에 온통 불을 지르는 진달래, 길 양쪽으로 늘어서 터널을 만들고 흐드러진 꽃비를 뿌려대는 벚꽃, 잎 떨어진 나목들 사이에 노랗게 점점이 들어앉은 산수유와 생강나무들이 제각각 자신이야말로 봄을 데려온 최고의 전령사라고 뽐내지만, 매화야말로 빛깔로 향기로 눈과 코를 통해 사람을 홀리는 진정한 봄이라 말해주고 싶습니다.
일지매가 매화꽃 한 가지를 표식으로 남긴 것은, 아마도 봄이 그렇듯 내 마음을 훔쳤다는 자신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반가운 빗소식이 있습니다.
사랑퇴에 앉아 봄비 속 꽃비를 차경하면서 매실주 한 잔에 취해보는 호사는 그냥 꿈일까요?